북세통
'유럽 최고의 경영 석학' 인시아드 이브 도즈 교수
"게리 해멀(Hamel)의 핵심역량 이론은 이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게리 해멀이 누구인가? 기업이 성공을 위해서는 경쟁사와 차별되는 핵심역량(core competence)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 선정 10대 비즈니스 구루(guru) 중 1위에 오른 경영 석학 아닌가? (2008년 11월22일자 Weekly BIZ 인터뷰 참조)
그런 해멀의 이론을 썩은 무 자르듯 한마디로 반박한 사람은 인시아드(INSEAD)의 이브 도즈(Yves Doz·62) 교수. 기업 혁신과 글로벌 전략 분야에서 유럽 최고의 경영 석학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해멀과 도즈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이다. 1998년 '협력의 강점(Alliance Advantage·국내 미출간)'이라는 책을 함께 썼고, 서로의 책에 추천사를 써주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의 이론을 비판하는 데 도즈 교수는 망설임이 없었다.
최근 LG CNS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도즈 교수는 Weekly BIZ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지금처럼 불확실하고 변화의 속도가 빠른 상황에서 기업들이 핵심역량에만 집중하다 보면 망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도즈 교수와 Weekly BIZ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07년 7월21일자 Weekly BIZ) 넉넉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도즈 교수는 그동안 해멀의 말에 귀 기울여 온 경영자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법한 말을 막힘 없이 쏟아냈다.
▲ 유럽 최고의 경영 석학으로 꼽히는 인시아드(INSEAD)의 이브 도즈 교수는“요즘처럼 급변하는 상황에서 핵심역량 이론은,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운전자가 한곳만 바라보는 것처럼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 게리 해멀은 틀렸다… 승리의 저주를 피해라
―게리 해멀이 왜 틀렸는가요? 그가 이 자리에 있으면 매우 섭섭할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런가요. 해멀의 핵심역량 이론은 1990년대 혼다나 캐논 같은 일본 회사를 대상으로 해서 만든 이론입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명확하고 방향이 확실한 전략을 세우고, 거기에 집중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때 일본 기업들은 미국 자동차회사, 독일 카메라 메이커처럼 경쟁 상대가 분명했고, 그들보다 나은 기술을 개발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지요. 기술의 연속성도 없고, 경쟁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음반산업에서 애플이 소니뮤직을 이길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었나요? 특정 분야(핵심역량)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 다른 분야에 둔감해집니다. 마치 빠른 속도로 자동차를 몰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앞만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옆에서 굴러 들어오는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게 되지요."
―하지만 큰 성공을 위해서는 핵심역량에 집중해야 하지 않는가요?
"맞는 말입니다. 그게 딜레마지요. 문제는 성공한 기업은 자신의 핵심 비즈니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익숙해진다는 점입니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지고, 정보도 없어요. 간혹 '이웃집은 어떤가' 하고 나갔다가도 낯선 상황에 움찔하며 금세 익숙한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오지요. 주주들도 핵심 비즈니스에서 돈을 벌어다 주는 경영진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핵심 비즈니스 내에서 이루어지고, 혁신이 끼어들 틈은 사라지게 되는 거지요."
―요즘 같은 불황일수록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더욱 핵심역량에 매달리는데….
"그렇습니다. 물론 불황에는 단기적으로 핵심 역량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돼서는 안 됩니다. 미래의 성장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승자가 되는 순간 내리막을 걷게 되는, '승리의 저주(the curse of success)'에 빠지게 됩니다. 간혹 이런 문제를 식스 시그마나 서비스 개선 같은 '운영 개선(operation improvement)'을 통해 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단기적으로는 성과가 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 돼요. 오히려 핵심 고객에 종속돼, 새로운 고객을 발굴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승리의 저주를 피하는 방법은 없을까? 도즈 교수는 '전략적 민첩성(strategic agility)'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 맞춰 전략을 수정하며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의 조어(造語)이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건넌다고 합시다. 무작정 처음 결정한 항로로만 가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난파할 가능성이 큽니다. 바람과 파도의 흐름을 읽으며 수시로 방향을 바꾸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죠." 그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며 정확한 시나리오를 만드는 전통적인 전략 수립으로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부연했다.
■ 전략적 감수성·집단적 몰입·자원 유동성 갖추어야
―어떻게 하면 전략적 민첩성을 갖출 수 있나요?
"전략적 민첩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전략적 감수성(strategic sensitivity)'입니다. 변화무쌍한 트렌드를 신속하게 인식하고, 이를 현장에 활용하는 것이지요. 둘째 '집단적 몰입(collective commitments)'입니다. 기업 구성원들이 공통의 목적을 향해 함께 열정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자원 유동성(resource fluidity)'입니다. 자본이나 인재 같은 기업의 자원을 필요에 따라 신속하게 재배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승리의 저주'에 빠진 기업은 핵심 사업부가 자원을 독점하기 쉽지요."
―세 가지 중 전략적 감수성 확보가 가장 어려워 보입니다. 트렌드를 감지하는 후각이 뛰어난 천재를 영입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몇 가지 팁을 알려 드리지요. 우선 CEO들이 보고 같은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 외부 전문가들을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업무 시간 중 3분의 1은 창 밖을 보면서 외부의 변화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데 사용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두 번째는 CEO들이 임원들과 논쟁(debate)이 아닌 대화(dialogue)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미리 결론을 정하지 말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 고민의 과정을 공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사 결정 과정에 보다 많은 구성원들을 참여시킬 필요가 있어요. 다양한 의견이 교차하면서 예민한 감각이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전략적 민첩성에서는 스피드가 생명입니다. 그런데 집단적 몰입이나 집단 토론은 신속한 의사 결정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아주 실용적인 질문입니다. 문제는 방법이지요. 회사 리더들이 모여 토론할 때 명확한 주제가 없으면 결정이 지연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제를 명확히 하고,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토론을 충분히 효율적으로 할 수 있어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집단 토론은 한국의 대기업처럼 사업이 다각화된 기업보다 노키아나 인텔처럼 특정 사업 분야에 집중하는 회사에 더 맞습니다."
―전략적 민첩성을 잘 갖춘 기업의 예를 들어주시죠. 작년에 낸 책('신속 전략 게임')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 노키아입니까?
"좀 민감한 질문인데…. 솔직히 말하면 노키아가 작은 화학제품 제조회사에서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업체로 변신할 때는 전략적 민첩성을 발휘했다고 봅니다. 다른 기업들이 휴대전화를 소수사람들이 사업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제품이라고 생각할 때, 노키아는 패션 제품으로 되는 트렌드를 재빨리 읽어 냈지요. 하지만 단말기 제조 이후를 잘 준비하고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노키아보다는 IBM이 가장 성공한 모델입니다. 컴퓨터 하드웨어를 만드는 회사에서 인터넷 서비스 기업으로 변신에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외부 조직과의 협업을 활발히 했고, 지역 전문가를 불러 현지의 정보와 기술 트렌드를 탐구했지요."
■ 저가 상품 선호하는 소비 행태에 주목
―한국 기업들의 전략적 민첩성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LG그룹 초청으로 왔다는 건 잠시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좀 무리한 요구입니다.(웃음) 간단히 말하면 노키아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삼성이나 LG는 한국 내에서 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품질도 뛰어납니다. 저의 자녀도 한국 휴대전화를 좋아해요.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좀 더 검증받아야 합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히트 상품을 낼 수 있느냐, 또 자신의 독창적인 경영 모델을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외부에서 더 많은 자극을 받아, 더 강해져야 합니다."
―요즘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기업들이 주목해야 할 트렌드는 무엇인가요? 전략적 감수성을 발휘해서 좀 알려주시죠.
"최근 받은 질문 중 가장 어렵네요. 그걸 알면 저는 이미 부자가 됐을 겁니다.(웃음)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소비 성향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어요. 가끔씩 이번 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자문해 봅니다.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소비 성향입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자동차 회사인 르노가 로간(Logan)이라는 5000유로(약 850만원)짜리 저가(低價) 소형차를 루마니아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란, 이집트,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브라질 등 개발도상국을 겨냥한 것인데, 지금은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어요. 독일에는 이미 BMW나 벤츠 같은 차들이 있습니다. 독일 국민이 경제 위기 때문에 잠시 저가 상품으로 소비 성향을 바꾼 것인지, 아니면 이런 소비 행태가 지속될지가 중요합니다. 만약 소비 성향이 완전히 바뀐 것이라면, 소비 규모가 줄면서 위기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기업들도 완전히 전략을 새로 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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