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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투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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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투기의 역사


이 책의 원제를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품위 있는 말은 아니지만 '동작 빠른 놈이 장땡' 정도가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본주의와 증권시장이라는 매커니즘을 활용하게 된 이후 일확천금을 노리고 투기에 뛰어든 인간의 행태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일 성싶다. 버블을 이용해 일확천금을 벌기 위해 모든 자산을 걸고 투기를 벌이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품고 있는 하나의 착각, 즉 "우둔한 자들에게 (주식을) 팔아 넘기고, 나는 버블이 파열하기 직전에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국은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도래해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들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챈슬러는 이 책에서 먼저 로마시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의 투기에 대한 관심을 개괄적으로 정리한다. 그리고 1630년대 네덜란드의 튤립투기, 1690년대 영국의 주식회사 설립 붐과 1719년의 사우스시 파동, 1820년대 영국과 유럽의 이머징마켓, 1845년 영국의 철도회사 버블,1860-70년대 미국의 부동산 및 주식투기, 1920년대 후반 미국의 주식투자 열풍, 1980년대 차입매수 붐과 정크본드 투기로 설명되는 카우보이 자본주의, 일본의 버블경제를 설명한 가미가제 자본주의, 1990년대 인터넷 버블 등 17세기 이후 20세기까지 대표적인 투기 역사를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재미있게 풀어쓰고 있다.

 

저자는 금융투기를 분석하는 데 찰스 킨들버거(Charls Kindleberger)가 『투기적 광기와 공황』(Manias, Panics and Crashes)에서 제시한 '투기분석 모델'을 준용하고 있다. 새로운 산업의 태동이나 기존 산업의 수익률 변화, 새로운 기술의 출현 등 사회구성원의 눈에 '새로운 것'이 출현하면 '투기적 광기(speculative mania)'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산가치에 거품이 발생하고, 수많은 순진한 투자자들이 일확천금을 위해 투기대열에 뛰어들고, 끝내는 버블과 투기의 희생자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는 투기를 도덕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초과수익이 예상되는 '새로운 것'이 출현하면 언제든지 투기가 출현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속성을 냉정하게 관조하고 있다. 그리고 철도주식 투기 이후 영국의 철도산업이 발전했고, 자동차주식투기 이후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발전한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며, 투기가 새로운 산업을 한 사회의 주력산업으로 성장시키는 기능을 했음을 밝혔다. 또한 투기는 새로운 주력산업의 성장과 함께 부의 질서도 재편한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규제를 혐오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싹튼 투기적 광기가 한 시대를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정부의 시장개입을 정당화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점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최근 세계 경제 흐름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인터넷 버블과 투기를 거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케인즈적 패러다임이 부활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1. 거품으로 만들어진 세계: 금융버블의 기원

무엇이든 교환하려는 인간의 성향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미래를 점치려는 경향도 인간 본성 깊숙이 자리잡은 특성이다. 이것이 투기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된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투기는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는 국가기능 가운데 조세징수에서 신전건립까지 상당부분을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조직에 아웃소싱하였다. 퍼블리카니는 현재의 주식회사처럼 파르테스(partes, 주식)를 통해 소유권이 다수에게 분산된 법인체였다. 당시 주가수준이나 주식시장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주가 변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있다. 키케로는 자신의 기록에 '고가 주'라는 단어를 쓰면서 "부실한 퍼블리카니의 주식을 사는 것은 보수적인 사람이면 피하는 도박과 같다."고 말했다.

 

유럽은 중세 말기에 스콜라적 전통이 붕괴하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채권이 발행, 유통되기 시작했다. 14세기 이후 베니스뿐만 아니라 플로렌스와 피사, 베로나, 제노바까지 확산되었다. 도시국가들은 주식(loughi)을 발행해 조달한 자본으로 세워진 회사들에 징세업무를 위탁하였는데, 이 초기 주식회사는 로마의 퍼블리카니와 매우 비슷했다. 북부 유럽의 정기시장에서는 중세 봉건왕조가 금기시하였던 상거래와 금융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시장참여자들은 지급불능 가능성이 높을수록 채권 값이 떨어지는 매커니즘을 발전시켰다.

17세기 초반 네덜란드 경제는 유럽에서 가장 왕성했고 선진적이었다. 1610년에는 암스테르담에 새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온갖 형태의 금융상품 매매가 이루어졌다. "상품과 외환거래, 주식, 해상보험... 암스테르담은 하나의 자금시장이었고 금융시장이었으며 증권시장이었다." 금융거래는 자연스럽게 투기로 이어졌다. 미래 시점에 확정된 가격에 상품을 인도하기로 하는 선물거래가 일반화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선물거래 대상이 매우 다양해졌다.

 

1630년대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30년 전쟁으로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되어 네덜란드 직물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 지역을 차지한 동인도 회사의 주가는 17세기 최고의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당시 유럽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인들은 풍요와 오만에 젖어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튤립이었다.

 

 

2. 튤립 - 바보의 고깔모자

1573년 터키 술레이만에 파견된 네덜란드의 대사 오기에르 부스베크가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식물학자였던 카롤루스 크루시우스에게 튤립 한 뿌리를 선물했다. 크루시우스는 이를 번식시켜 다시 여러 사람에게 배분했고, 자신이 집필한 『식물도감』에 등재했다. 초기 튤립은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꽃의 색깔에 따라 튤립을 다양하게 분류했다. 최상급 꽃은 잎에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어 '황제'라고 불렸고, 이어 '총독'과 '제독' '장군' 순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1624년 황제 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와 맞먹는 1,200 플로린(당시 유통된 금화)에 거래되었다.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튤립의 특성이 투기의 우연성을 극대화해주었다.

 

네덜란드에서 튤립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프랑스인들도 한 몫 챙기기 위해 1634년 파리 근교와 프랑스 북부지역에 튤립시장을 열었다. 튤립 투기가 국제화된 것이다. 1636년부터 1637년 겨울에는 튤립 뿌리들이 아늑한 땅 속에 묻혀 있어 거래가 성사되어도 투기꾼들은 뿌리를 인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람거래'로 불린 튤립 선물거래가 나타났다. 파는 사람은 미래의 일정시점에 정해진 종류의 튤립 뿌리를 전달하기로 약속하고, 사는 사람은 받을 권리를 갖는 것이다.

대부분의 거래는 어음결제로 이루어졌고, 이 어음의 만기는 대부분 튤립 뿌리를 캐는 다음해 봄이었다. 투기꾼 가운데 6만 길더를 벌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쥐고 있는 것은 현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어음'뿐이었다. 투기 열풍이 끝나갈 무렵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튤립 뿌리는 돌고 돌아 실체가 없는 거래가 되어버렸다.

 

1637년 2월 3일 튤립시장이 붕괴했다. 튤립거래의 중심지였던 하르렘에는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다는소문이 수일 전부터 나돌고 있었다. 실제로 다음날 저가에 내놓은 튤립조차 전혀 팔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도가 줄지어 발생했다. 전문적인 꽃 상인들은 채권투기꾼들에게 보유어음을 넘겨 일부나마 회수하려고 발버둥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네덜란드 예술가 피에터 놀페(Pieter Nolpe)가 튤립투기 직후 발표한 조각품〈바보의 고깔모자〉는 커다란 고깔모자 속에서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 투기꾼을 묘사한 것이다. 투기는 군중심리와 르네상스 시대 카니발 분위기를 타고 성장했다. 카니발이나 축제기간에는 도박이 널리 행해졌다. 17세기에 들어 카니발은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축제는 거래소에 의해 대체되었지만, 카니발 심리는 오래도록 살아남아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자본주의의 광기로, '바보들의 잔치'로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3. 1690년대 주식회사 설립 붐

1687년, 뉴잉글랜드 호의 선장 윌리엄 핍스가 히스파니올라 섬 부근에 침몰한 스페인 해적선에서 건져 올린 은 32톤과 상당한 양의 보석들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왕과 선장, 선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긴 뒤 남은 19만 파운드를 1만 %의 배당금 형태로 항해를 지원했던 파트너들에게 배분했다. 이들의 성공적인 귀환은 영국 전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양치기 소년이었던 핍스 선장은 돌아온 지 3주만에 기사작위와 기념메달을 받았다.

 

사정이 이쯤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핍스 선장을 모방해 해저유물 인양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핍스 선장처럼 파트너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보물인양회사들의 주식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1690년대 영국 주식시장에서는 건전한 이기주의와 악명 높은 사기가 날줄과 씨줄처럼 얽혀있었다. 발기인들은 제 주머니만 불리기 위해 급조한 주식회사들을 마구 상장시켰고, 주가는 조작되었으며 허위정보들이 마구 돌아다녔다. 1694년 6월 21일 영란은행이 의회인가를 받고 정식 출범했다. 이는 금융혁명에 일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영란은행은 120만 파운드를 정부에 빌려준다는 조건 아래 영국최초의 인가은행이 되었으며, 은행권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영란은행의 주식의 공모는 청약개시 2-3일만에 마감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청약자 명단에는 윌리엄 오렌지공의 총신인 포틀랜드 백작을 비롯해 약방주인과 등짐꾼, 옷수선공, 자수공, 농사꾼, 선원, 부두노동자 등 온갖 종류의 군상들이 있었다. 배정 받은 영란은행 주식은 20%의 프리미엄을 받고 팔려나갔다. 그리고 주식시장은 버블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 든 비용은 영국정부의 재정수입을 초과했다. 정부는 마침내 과거의 망령을 깨웠다. 통화품질을 떨어뜨린 것이다. 금의 함량을 줄인 것이다. 품질이 떨어지면서 영국인들은 집에 양화를 축장하기 시작했고 악화만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다. 1696년 여름 존 이블린은 일기에 "시장에서 생필품도 사지 못할 만큼 돈이 부족했다."고 기록했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마침내 폭동이 일어났다. 금융의 핵심인 신용도 붕괴되었다. 정부의 단기채권은 폭락해 할인율이 40%까지 치솟았다. 마침내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고, '우량주'였던 동인도회사의 주가도 1692년 200파운드에서 1697년에 37파운드로 폭락했다. 169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있던 140여 개의 주식회사 가운데 1697년까지 살아남은 회사는 단 40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공황은 투기와 연결되어 발생한 최초의 경제공황이다.

 

4. 1845년 철도 버블

슘페터는 "혁신은 자본주의 경제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투기꾼은 자본주의 경제의 전위대다. 1844년 후반기의 영국 경제상황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이자율은 지난 100년 동안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연이은 풍년으로 곡물 값도 낮게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철도건설 비용은 낮아졌고 철도회사의 당기순이익은 빠르게 상승했다. 당시 3대 철도회사는 통상 이자율의 거의 3배에 이르는10%의 배당을 실시했고, 철도혁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었다.

 

1845년 1월 16개 노선의 철도건설이 계획되어 자금조달에 들어갔고, 4월이 되자 철도건설 접수 건수가 빠르게 늘었다. 50개의 새로운 철도회사가 등록되었으며 이들 기업의 사업설명서와 주식공모 광고가 신문을 도배했다. 이 광고에는 회사 임시 발기인명단과 건설할 철도의 수익성, 10% 이상의 배당수익을 약속하는 문구가 꼭 들어가 있었다.

 

1845년 6월말 현재 13만 킬로미터의 철도건설 신청을 무역위원회가 심사하고 있었다. 이는 그때까지 건설된 기존 철도길이보다 4배나 더 긴 것이었고, 영국 국토의 남북길이의 20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7월에는 한 주 동안 12개 철도건설 계획이 공표 될 정도였다. 「더 타임스」는 1845년 10월 말 5억 6,000만 파운드 이상이 필요한 1,200개의 노선이 계획중이며, 겉으로 드러난 철도회사의 채무는 6억 파운드가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당시 5억 5,000만 파운드였던 영국 국민총생산을 초과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도대체 어디서 그 많은 돈을 조달할 수 있겠는가?"라며 자금 조달 가능성에 의문을 표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과거 공황에서 발생했던 해프닝들이 되풀이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투기에 달려든 것이다. 1845년 늦여름 철도버블은 부풀어오를 때까지 부풀어올랐다. 한 철도회사의 주가수익배율이 5배까지 치솟았고, 철도회사 주식의 담보대출 이자율은 80%까지 솟구쳤다. 투기열풍은 소도시를 연결하는 지선망에도 몰아닥쳤고, 해외 철도에도 번져 수많은 해외철도 건설계획이 수립되었다.

 

철도투기에는 수많은 공직자들의 부패와 철도회사 임원들의 협잡이 발생했다. 철도건설이 본격화되자 철도회사들은 납입되지 않은 주식대금을 청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철도회사들은 의회인가를 받기 전에 주식대금의 일부만 받고 주식을 매각했다.)

 

1845년 10월 초 주식대금 납입을 위해 투기꾼들이 보유주식을 내다 팔기 시작하자 주가는 주저앉기시작했다. 비극의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해 10월 말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회사의 주가는 최고점을 기록한 8월에 비해 40% 폭락했다. 철도투기가 파국을 맞자 철도회사 발기인들과 주식 청약자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주가가 치솟을 때는 청약자들이 1만 파운드 어치를 청약해도 단 몇 주만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청약자들은 자신의 납입능력보다 훨씬 많은 주식을 청약했다. 그런데 주가가 폭락하자 사정이 급변했다. 청약한 금액만큼 원치도 않았던 주식을 떠 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식대금 납입을 독촉 받게 되었다. 「글래스고 내셔널」 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든 투기꾼들을 지배했던 탐욕이 이제 공포의 잔혹함과 복수의 광기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5. 새 시대의 종말

1920년대 미국에서 신기술에 대한 투기꾼들의 환상은 주식시장의 호황을 유지하는 동안 지속되었다. 경제적 번영의 원동력과 투기의 대상으로서 자동차가 철도를 대체했고, 미국의 문화와 지도를 바꾸어놓았다. 곳곳에 자동차도로와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수많은 차고가 세워졌다. 1920년대 미국 자동차는 700만 대에서 2,300만 대로 폭증했다. 1925-1928년 사이에 제너럴모터스의 주가는 10배 이상 치솟았다. 이 주가 급등은 당시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이와 아울러 1920년대 웨스팅하우스사에 의해 처음 세상에 출현한 라디오는 획기적인 문화전달매체였다. 라디오 판매대수는 1922년 6.000만 대에서 6년 뒤인 1928년에는 8억 4,000만 대로 급증했다. 라디오 시장은 RCA가 장악하고 있어, 당시 미국인들은 이 회사를 그대로 '라디오'라고 부를 정도였다. 따라서 RCA 수익은 1925년 250만 달러에서 1928년에는 2,000만 달러로 폭증했고, 주가도 1921년 1.5달러에서 1928년 85.5달러로 57배나 솟구쳤다. 투기열풍은 찰스 린드버그가 1927년 대서양 횡단 단독비행에 성공하자 항공기 산업으로 번졌고, 할리우드가 무성영화에 목소리를 불어넣는 데 성공하자 영상사업도 투기꾼들의 인기종목으로 부상했다.

1920년대 미국 증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빚을 내 주식투기를 벌이는 차입투기의 일반화였다. 당시 투기꾼들은 마진론을 끌어와 요즘 유행하는 '묻지마 투자'를 벌였다. 이 '묻지마 투자'의 실상은 25만 달러에 이르는 마진론을 끌어다 주식투기를 벌였던 영화배우 그루초 막스의 일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증시가 대세상승을 보이면, 투자자문은 전혀 필요 없다. 그저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시세판 을 찍어 그 주식을 사면, 무조건 오른다."

 

차입투기는 개인투자자들만이 벌인 게 아니었다. 이는 당시 '주식회사 미국의 금융구조'가 돼버렸다. 가스와 철도 등 공익성이 강한 기업들이 지주회사에 의해 인수 합병되었고 이러한 공공서비스 기업들에 대한 인수 합병 열풍은 1920년대 호황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1929년 이들 기업의 평균주가는 액면가의 4배 이상으로 뛰었고, 시가배당률은 1%이하로 떨어졌다. 은행들도 인수합병을 통해 대형화를 이루어냈다. 당시 투신사들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1928년에는 200개가 넘는 새로운 투신사가 1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끌어 모아 설립되었고 1929년 1월∼8월 사이에는 하루에 한 개꼴로 투신사가 설립되고, 25억 달러 규모의 수탁고를 올렸다.

 

주가가 주당수익의 30배를 초과하자, 새시대의 주식가치 평가방법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24년 이후 주가는 기업의 순익증가율보다 3배 이상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높은 이자율은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기 시작했고, 임금상승은 거의 정체되어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짊어지고 있는 할부채무는 늘어만 갔다. 미래를 저당 잡히는 할부 구매가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영국과 독일에서 뉴욕으로의 금 유입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바람에, 이들 국가에서는 이자율이 상승하고, 미국의 수출이 둔화되었다. 또 미국에서는 곡물수출 둔화로 미국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의 구매력이 저하되었다.

 

1929년 9월 3일,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월스트리트에 찾아들었다. 이 날 다우존스지수는 이해 최고점을 기록했고, 바로 하루 뒤인 9월 4일 투자자문업자 로저 베브슨이 이날 열린 연례 미국 경제인회의에서 증시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경고한 것이다.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고... 악순환이 되풀이 될 것이며, 결과는 가혹한 경제공황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1929년 10월 24일 거품은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1930년 4월이 되자 다우지수가 300선을 돌파해 1929년 10월 붕괴이후 저점을 기준으로 50% 회복했다. 하지만 다우지수의 '곡예비행'(1929년 10월 -1930년 4월 초 사이의 다우지수 급변동)은 1930년 봄 끝내 추락하기 시작 다우지수가 41.88포인트까지 급강하한 1932년까지 이어졌다. 이 사이에 미국의 GDP는 1929년 수준에서 60%가 줄어들었고, 실업자 수는 1,250만 명까지 늘어났다. 농업인구를 뺀 나머지 국민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1932년 3월에는 성냥왕 이바르 크루거가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달 뒤인 4월에는 새뮤얼 인설이 부도를 맞고 해외로 도피했다. 이후 그는 소환되어 사기혐의로 법정에 섰다. 골드만 삭스 이사들도 회사공금을 낭비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서야했다. 1930년 말 윌리엄 듀란트의 보유주식은 증권사 직권으로 팔렸고, 그는 1936년 100만 달러에 가까운 빚을 갚지 못해 파산선고를 받아, 결국 뉴저지의 한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으로 접시를 닦아 생계를 이어야 했다.

 

1907년 주가 대폭락 시기에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던 제시 리버모어는 1934년 파산을 선언하기까지 3,200만 달러의 평가 손을 입고, 6년 뒤인 1940년 뉴욕 세리 네덜란드 호텔 주방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목숨을 끊었다. 1929년 114달러에 거래되었던 RCA 주식은 1932년 주당 2.5 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이 주식으로 작전을 벌였던 마이크 미핸은 4,000만 달러를 날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36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역사는 공황을 유발한 온갖 군상들과 함께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6. 카우보이 자본주의

1971년 8월 1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과거 25년 동안 세계 경제를 지배해왔던 브레튼우즈 체제는 종말을 고하고, 투기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지불의무를 표현한 '종이'를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17세기 후반 1차 금융혁명기에는, 그래도 모든 가치가 금에 의존했다. 따라서 금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투기 제어 장치로 기능했다. 투기에 대한 고삐가 풀리고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모든 사람들이 금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인들의 머릿속엔 대공황의 교훈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레이건 시대의 영향으로 기업인들이 다시 존경받게 되었고, 금융시장에서는 규제 완화가 관리 감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82년 여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인 폴 볼커가 마침내 재할인율을 낮추겠다고 선언했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이로서 1932년 최저점까지 추락한 증시는 반세기만에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영국의 대처수상이 국영기업의 주식을 시장에서 매각하는 방식으로 민영화하는 동안, 레이건 시대 미국에서는 다른 방식의 민영화가 이뤄졌다. 차입매수방식(LBO: leveraged buyout, 인수할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차입금을 조달해 벌이는 기업인수)으로 증시에 상장된 수많은 공기업들의 소유권이 민간으로 넘어간 것이다. 인수를 위해 빌린 돈의 원금과 이자는 피인수 기업이 벌어들이는 현금으로 순식간에 상환되었고, 차입 매수꾼들은 이를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 다시 내놓거나 주식시장에 다시 상장시켜 엄청난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자율의 하락과 자산가치의 상승만으로 차입매수가 활성화된 것은 아니었다. 기업 차입금의 이자에 대한 세금감면 혜택을 주는 조세정책도 차입매수의 활성화에 일조했다. 주식투기를 위해 빌리는 마진론의 한도를 담보주식 가치의 50%로 제한하고 있었지만, 기업매수를 위한 차입에는 제한이 없었다. 심지어 차입 매수꾼들이 지는 차입금에 대한 법적 책임은 악어 눈물만큼 적었다. 피인수 기업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투자자들에게 팔아 위험을 전가시켰기 때문이었다.차입매수 붐은 1980년대 중반 미국 증시 활황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전통적인 기업가치 평가방법이 의미를 잃고, 인수 합병 가치가 중요한 기업가치 평가수단으로 등장했다. 현금 흐름이 얼마나 좋고, 어느 정도의 채무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따라 기업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차입 매수꾼들이 기업을 인수할 때 인수에 들인 차입금을 원활하게 상환할 수 있는 기업이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1987년 8월 25일 뉴욕 증시의 다우지수는 2,746포인트로 마감되었다. 87년 들어 이날까지 43%가 상승한 것이다. 모건 스탠리가 투자자들에게 100%의 포트폴리오를 주식에 투자하라고 충고할 만큼 그 해 초가을 뉴욕 증시는 대세상승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후 증시자금 유입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본정부가 주식매각으로 NTT를 민영화하기 위해 350억 달러 규모의 주식매각을 준비하는 동안, 일본 투자자들이 보유자산을 처분해 현금을 마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로 미국 재무성 채권값이 떨어지고 엔화에 대한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있었다. 미국 재무성 채권에 투자했던 일본 투자자들은 이 때문에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 투자자들이 재무성 채권을 팔기 시작하자 채권값은 더 떨어졌다. 따라서 기업의 평균순익의 23배 이상에서 거래되고 있던 주가가 상대적으로 고평가되었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검은 월요일'인 10월 19일 증시 대폭락은 극동에서부터 시작했다. 뉴욕 증시가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각에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증시가 크게 폭락했고, 이어 유럽국가의 증시들이 뒤따라 주저앉기 시작했다. 뉴욕이 잠에서 깨어나 맞은 월요일 오전 9시 30분, 증시가 개장했지만 대형주들에 대한 매수주문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30분이 지난 10시, 대형주들의 주가 흐름을 보여주는 S&P500지수에 편입된 500개의 종목가운데 25개 종목만이 거래가 이루어졌다.

 

뉴욕에서 투자자들이 주식매도를 하지 못하는 동안,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주가지수 선물거래는 가능했다. 따라서 선물매도세가 집중되었고, 주가지수 선물 값이 뉴욕 증시의 현물값 이하로 하락했다. 정상적인 시장상황이라면 차익 거래자들이 현물을 팔고 선물을 사들여 두 시장의 갭을 축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변동성이 너무 컸기 때문에 차익거래자들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대신 광적인 선물 매도세는 뉴욕 증시의 현물 값을 폭락시켰고, 이는 다시 선물매도 사태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그리고 정오 직전 미국 언론들이 일제히 증권시장 당국이 휴장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투자자들은 장이 열려있는 동안 한 주라도 더 팔아치우기 위해 앞다투어 주식을 내던졌다.

 

1987년 미국 증시 대폭락으로 1조 달러에 가까운 돈이 공중으로 증발해 버렸지만, 1929년과는 달리
경제 공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87년에 대폭락의 여파가 크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지만, 효율적 시장론자들은 투기적 붐과 증시 대 폭락이 경제 대공황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
을 보여주는 증거로 1987년 증시 대폭락을 꼽고 있다.

 

7. 가미가제 자본주의

1980년대 중반, 20세기 70여 년 동안 유지해 온 미국의 경제패권이 일본의 경제력으로 인해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상품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10%를 넘었고, 무역수지 흑자 역시 대규모로 늘어났다. 일본의 자본수출은 10세기 영국에 비견될 만큼 활발했고,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조만간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전자제품 등 일본의 상품은 세계시장을 석권했으며, 은행들은 자산규모와 사장가치 면에서 세계정상급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자이테크(재테크)'라는 다양한 자산운용으로 엄청난 영업외 수익을 벌어들였다. 자이테크 투기가 본격화된 것은 일본 기업들이 역외시장인 런던의 유러본드 시장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1981년 일본 대장성은 금융자유화 조치의 하나로 기업들이 유러본드 시장에서 신주인수권부 사채(BW)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시 일본기업들은 자사주가가 오르면 오를수록 BW 값이 따라 올랐기 때문에 아주 낮은 이자율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엔화상승이 지속되고 있는 점을 이용해 달러표시 BW를 발행한 뒤, 이 채무를 스왑시장에서 엔화표시 채무로 스와핑 해 엔화자금을 일본 내로 끌어들였다. 이에 따라 가치가 하락하는 달러대신 상승하는 엔화를 조달해 만기시점에서 환차익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다. 결국 일본 기업들은 자금조달 과정에서 마이너스 이자를 지급했고, 더 나아가 조달한 자금을 곧바로 주식시장에 쏟아 붓거나 연 8%을 보장하는 증권사 투금계정에 투자해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1980년대 후반 일본 기업들의 돈놀이 규모는 도쿄 증시의 활황과 맞물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 때문에 도쿄 증시에서는 선 순환이 발생했다. 자이테크는 수익을 창출했고 이는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다시 자이테크의 수익성이 높아진 것이다. 1980년대 말 도쿄 증시의 상장기업 가운데 대부분이 자이테크를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도요타와 닛산, 마쓰시타, 샤프 등 국제적인 지명도가 있는 기업들이 낸 순이익의 절반이 이 자이테크를 통해 달성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기간 동안 일본 기업들의 영업이익이 감소했다는 사실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기업은 기존의 비즈니스를 포기하고 자산운용에만 전력을 다한 경우도 있었다. '아시아의 땅귀신'이라고 불린 철강회사 한와는 자이테크를 통해 4조 엔(30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굴렸으며, 여기서 얻은 수익이 본업으로 얻은 이익의 20배를 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일본 기업들이 조달한 자금이 모두 투기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신주인수권부 발행으로 조달된 자금이 생산설비 투자에도 흘러 들어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최고 설립투자 붐이 불었다. 이 시기 일본 기업들은 3조 5,000억 달러에 이르는 설비투자를 했다. 그리고 이때 일본이 달성한 경제성장의 3분의 2가 이 설비투자 덕분이었다.

 

1985년 9월 미국의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뉴욕 맨해튼 플라자호텔로 각 국 재무장관을 소집했다. 베이커의 압박에 각국 재무장관들은 달러가치, 특히 엔화에 대한 달러가치를 떨어트리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각국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에 나선 다섯 달 뒤인 1986년 1월, 1달러당 엔화 환율이259엔에서 150엔으로 떨어졌다. 일본 엔화의 구매력은 40%까지 오르고, 달러로 표시되는 상품가격은 그만큼 하락했다. 엔화 강세가 연출되자 일본인들은 싹쓸이 쇼핑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제 고급 핸드백 루이뷔통부터 고흐의 그림까지 마구 사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제시장에서 일본의 상품 값이 갑자기 2배 가까이 뛰어 오르자 일본 기업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상당했다. 1986년 초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2.55로 떨어졌고, 엔화강세에 따른 불황이 덮쳤다. 1986년 일본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0.5%를 기록했고, 일본 기업들이 산업시설을 앞다투어 외국으로 옮기는 바람에 일본 산업이 공동화될 가능성마저 높아졌다. 사정이 이쯤 되자 다급해진 대장성은 이자율을 낮추라고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마구 윽박질러 1986년 한 해 동안 일본은행은 네 차례에 걸쳐 재할인율을 인하해 3%에 이르게 했다.

 

국제 원유가가 하락하고 있었고 엔화강세로 수입품 값이 떨어졌기 때문에 매년 10%에 달하는 총통화 증가가 소비재 가격상승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하여 1986년 8월 도쿄 증시의 닛케이지수는 연 초를 기준으로 40% 가까이 올라 1만 8,000에 달했다. 닛케이지수의 급격한 상승은 그 동안 주식에 관심이 없었던 일본인들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였고, 「니혼게이자이」가 경제상식을 다룬 만화를 펴내자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주식이 모든 일본인들과 모든 사회계층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에 이르렀다.

 

경제가 버블화되자 일본인들은 전후 유지해 온 근검절약 정신을 버리고 사치를 일삼기 시작했다. 외국 사치품 수입에 열을 올렸고 대출이자율이 떨어지자 부동산을 담보로 엄청난 은행돈을 끌어다 썼다. 신용카드 사용액은 3배 이상 늘었고, 1인당 부채규모가 1980년 미국 수준까지 치솟았다. 일본인들은 버블시기에 소비를 즐기는 사람들을 '신진루이'(신인류)라고 불렀다. 당시 도쿄에 근무하는 영국계 증권사 임원은 "긴자거리 나이트클럽에서 한 잔에 300달러씩이나 하는 위스키향 생수를 마시는 일본인들은, 주가가 너무 고평가되어 곧 추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이해 말 일본은행의 스미다 사토시 총재가 미에노 야스시로 교체되었다. 미에노 총재의 미션은 버블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일을 처리하는 데 미적거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인 1989년 12월 25일 그는 전격적으로 재할인율을 인상시켰다. 물론 이 때의 인상은 이해 5월에 이어 두 번째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나흘 뒤인 12월 29일 닛케이지수는 역사상 최고치를 갱신하고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도쿄 증시는 갑작스런 폭락으로 붕괴되지 않았다. 대신 고무풍선에서 서서히 빠지는 바람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도쿄 증시의 거래량이 버블시기의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지자, 수많은 외국 투자은행들도 도쿄 증시의 회원권을 팔고 철수했다. 미쓰비시의 록펠러센터 등 일본 기업들이 사들였던 수많은 해외 자산들도 헐값에 되팔려 나갔다. 도쿄를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던 일본인들의 꿈은 주가 하락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버블이 가시자 일본 경제는 바닥 모를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붐이 일었던 설비투자도 버블이 가라앉자 과잉투자로 드러나면서 극도로 위축되었다. 일본 정부는 경제와 증시부양을 위해 1998년 11월까지 8조 5000억 엔(6,40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금융정책도 다시 완화되었다. 재할인율이 계속 인하되어 1995년 9월에는 일본 역사상 최저 치인 0,5%까지 떨어졌다. 이 재할인율은 1998년 9월까지 유지되다 다시 0.25%로 인하되었다. 하지만 이런 초 저율의 이자율 정책도 경기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일본 경제가 케인즈가 말한 '유동성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버블이 터진지 9년이 지난 1998년 일본은 경제시스템 붕괴의 벼랑 끝까지 밀려났다. 은행들은 도저히 규모를 파악할 수 없는 부실 채권을 짊어지고 신음하고 있고, 기업들은 사상 최고의 손실을 기록했으며, 소비자들은 불확실한 앞날을 대비해 허리띠를 과도하게 졸라맸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1998년 9월 일본 은행들의 부실채권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규모를 털어 내고도 150조 엔 선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 여파로 수많은 기업들이 운영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도산에 직면했다. 또 일본인들 사이에 주식 혐오증이 광범위하게 퍼져 이자율이 연 0.5%도 되지 않은 요구불 예금에 돈을 맡기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8. 새 패러다임과 신경제

1990년대는 새 패러다임과 신경제라는 개념이 증시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다.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보혁명에 감탄하는 온갖 말들은 1840년대 영국 '철도혁명' 시기에 나왔던 언어들과 비슷하다. 철도와는 달리 인터넷은 많은 자본을 쏟아 부을 필요가 없었지만, 인터넷기업들은 주식을 상장시켜 철도회사 못지 않은 자본을 끌어들였다.

인터넷주식에 대한 투기는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이 나스닥에 상장된 1995년 여름 처음 감지되었다. 1996년 봄까지 상당수의 인터넷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되었고, 특히 같은 해 4월에 상장된 인터넷 검색엔진 업체인 야후는 1995년에 설립된 분기매출이 100만 달러밖에 안 되는 별 볼일 없는 회사였다. 그런데 이 회사 주식은 상장 첫날 153%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었다. 또 만년적자를 기록했던 텔레비전 제조업체 제니스는 이해 3월 인터넷과 연결할 수 있는 텔레비전을 생산할 것이라고 공시하자 주가는 순식간에 3배로 뛰어 올랐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주식시장에서 인터넷이라는 말만해도 뭔가가 일어난다"고 비꼬았다.

 

인터넷주에 대한 붐은 1998년에 한층 거세어졌다. 같은 해 말 미국 주요 인터넷기업들의 시가총액은 거대기업의 시가총액과 비슷해졌다. 온라인 증권사인 찰스 스왑의 시가 총액은 오프라인 증권사 메릴린치를 능가했고, 인터넷경매회사인 e-베이도 소더비의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인터넷 서비스업체인 AOL도 디즈니사의 시가총액보다 앞섰다. 야후의 시가총액은 연 수익의 800배에 달했고, 매출액의 180배에 달했다. 또 인터넷서점인 아마존닷컴의 주가는 이 회사의 손실 누적에도 불구하고 1998년 한해동안 18배가 뛰었다. 한 펀드매니저는 "지구상에서 가장 터무니없이 고평가된 주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아마존닷컴의 주식을 사라고 권했다.

 

인터넷기업의 공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열풍처럼 뜨거웠다. 인터넷 채팅서비스인 더글로브닷컴은 1998년 11월 중순 처음 공모를 실시해, 첫 거래 일에 주식이 866%나 뛰었다. 또한 1999년 1월 15일 마켓워치닷컴이 처음 매매개시 되었는데, 주당 17달러에 공모했던 주식은 이날 97.5달러로 마감되었다. 이에 「하이테크 스트래티지스트」의 편집장인 프레드 학키는 "인터넷 버블이 튤립투기 이후 가장 거센 투기"라고 말했다. 또 1999년 1월 하순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도 "인터넷 주의 가치평가는 그림의 떡과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터넷 기업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주식은 한 순간에 종이조각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복권에 취해 있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인터넷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아니다. 투기의 원천이면서 그 대상인 것이다. 빌 게이츠는 『미래의 길』에서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골드러시는 투기심리를 일깨워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소수만이 돈을 벌게 된다. 우리 뒤엔 손해를 본 대중들의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다. 결국에는 바보처럼 실패한 벤처의 잔해를 뒤돌아 볼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누가 저 회사를 세운 거야?', '무슨 생각을 갖고 저런 짓을 했지?', '저게 바로 투기의 참모습이 아니겠어?'라고 중얼거릴 것이다.

 

9. 투기, 그 양면의 얼굴

시장은 합리적이고 주가는 내재가치를 반영하며, 투기꾼은 자신의 부를 최적화하려는 합리적인 시장 참여자라고 주장하는 현대 경제학자들에게 투기의 역사는 아주 지루한 테마일 수 있다. 투기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고정환율제를 붕괴시켜 변동환율제로 전환시켰고, 최근에는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관료자본주의를 붕괴시켜 시장자본주의로 변화시켰다. 한편으로 무정부적인 파워로서 투기는 현재 지속적으로 정부의 규제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시 사슬을 끊고 정신착란을 일으킨 환자처럼 날뛸 것이다. 마치 진자처럼 경제적 자유와 규제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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