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교육과학기술부 김용환 국장이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국제기구 사무차장으로 부임했을 때, 프랑스 남부에 있는 카다라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울창한 숲뿐이었다.
건설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이건물에 책상만 덩그러니 놓였다. 토카막(플라즈마를 가두기 위한 도넛모양의 초전도자석 장치) 조립팀 일원으로 2006년 카다라시에 온 임기학 박사는 "
컴퓨터조차 없어 개인 컴퓨터를 가져다 썼다"고 회상했다. 2019년까지 10조원을 들여 건설되고 다시 그만큼 비용을 들여 2042년까지 운영될,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동
프로젝트라는 ITER를 상상할 수 있는 흔적은 토카막이 들어설 자리를 표시한 깃발뿐이었다. 태양중심에서 일어나는 핵융합반응을 인공적으로 일으켜 여기서 나올 막대한 에너지로 인류의 에너지고갈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역사적 실험이 벌어질 현장이었다.
4년이 지난 2010년 11월 2일 카다라시 ITER
건설현장은 분주했다. 총 180만㎡ 부지 중 60만㎡에서 나무를 베는 등 정지작업을 마쳤으며, 높이 30~60m의 대형 크레인 5대가 토카막건물, PF코일 조립건물, ITER본부건물이 건설 중이다. '인공태양'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가시화하는 인공태양의 보금자리"지금은 현장에 150명이 일하지만 3, 4년 뒤면 3,000~4,000명이 북적이며 건물을 지으면서 핵융합로를 조립하는 일이 동시에 진행되겠죠. 핵융합로의 상세설계에 따라 건물도 바뀌어야 한다는 게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ITER 현장건설팀장인 티모시 왓슨이
공사현장을 가리키며 설명한다.
높이 24m, 지름 28m의 토카막이 들어설 건물은 단단한 암반 위에 자리를 잡기 위해 지하 20m 깊이로 땅을 파고 들어간다. 가로 세로 100m 120m 크기에
콘크리트 3만5,000㎥가 소요된다. "핵융합반응 시 나올 중성자를 막기 위해 토카막장치에도 차폐장치가 있지만 건물벽도 1.5m 두께로 강화 콘크리트를 써서 짓습니다."(왓슨 팀장)
눈에 띄는 것은 길이 253m나 되는 PF코일 조립건물. PF코일이란 토카막 자기장을 만들기 위해 수평방향으로 초전도선재를 빙빙 감아 만드는 초전도전자석코일. 지름 28m 크기의 자석을 다른 데서 만들면 운반과정이 훨씬 어려워 현장에서 직접 감아 토카막에 조립된다. 20톤짜리 50개의 PF코일을 운반하기 위해 100톤 용량의 크레인이 건물 천정에 설치된다. 건물 벽은 8m 간격으로 총 62개의 강화콘크리트 기둥을 박아 이 하중을 견디도록 했다. 지금 이 건물 기둥을 박는 작업이 한창이다.
한국 유럽연합(EU)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인도 등 7개국이 참여한 36년짜리 ITER 프로젝트는 뭐든 통이 크다. 토카막 장치를 감쌀
진공용기만 8,000톤으로 에펠탑보다 무겁고 토카막 전체는 2만3,000톤에 달한다. 최대 600톤의 대형 부품을 운반하기 위해 프랑스는 도로부터 정비했다. 마르세유 인근의 포스 항구에서 카다라시까지 100㎞에 달하는 도로를 폭 8.5m
트럭이 다닐 수 있도록 넓히고 굴곡을 완화하고 갓길을 견고히 했다. 주행 중 걸릴 수 있는 전선과 배관도 제거됐다. 현장 입구의 미라보 협곡은 기존 도로와 평행하게 높이 3~8m의 둑을 쌓아 도로를 확장했다.
목소리 커진 한국1985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 서기장의 공동성명으로 이 대역사(大役事)의 첫 단추가 끼워졌을 때 우리나라는 플라즈마실험을 갓 시작한 후발국이었다. 우리가 1990년대 차세대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를 짓겠다고 하자 해외 반응은 무시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ITER 관계자들 사이에서 한국의 KSTAR는 '꼭 가볼 성지'가 됐다. 2007년 깔끔하게 준공하고, 최근엔 플라즈마 유지 6초(500kA)에 이르자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완벽한 고성능 핵융합장치를 만든 선례는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KSTAR에서 첫 플라즈마 발생에 성공했다고 발표를 듣더니 여기 사람들 얼굴색이 바뀌더군요. 요즘은 KSTAR를 직접 보고 오는 사람들마다 '대단하더라'며 어깨를 칩니다."(임기학 박사)
KSTAR가 더 주목 받는 이유는 ITER처럼 100% 초전도자석으로 된 최초의 토카막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해봤다, 해봤더니 되더라"는 KSTAR 성공경험은 ITER에겐
레퍼런스가 됐고, 한국인에겐
목소리를 키웠다. 핵융합연구소의 최창호 박사는 처음 ITER에 왔을 때 곁눈도 주지 않던 해외 전문가들에게 적잖이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최근엔 해외에서 발표하라는 제안을 받고 있다. 밤잠 설치고 '가능케 할 방법'만 고심하며 KSTAR를 밀어붙인 경험이 있는 그는 국제기구의 느린 의사결정이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는 "설계는 몰라도 장치를 만드는 데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최고"라며 "한국에 맡겨만 준다면 ITER 건설은 2019년이 아니라 2016년이나 2017년이면 된다"고 말한다.
임 박사가 속한 조립팀의 팀장은 올해만 4번이나 KSTAR를 찾았다. 한국의 국가핵융합연구소가 KSTAR의 토카막을 조립한 경험을 토대로 조립과정
연구용역을
수행중이고 국내 업체 SFA, 원일이 조립장비를 설계 제작하기 때문이다. 2,3㎜의 정밀도를 유지하며 1,500톤씩 하는 토카막 조각들을 끼워 맞춰 도넛 모양을 만드는 데에는 KSTAR 조립기술이 톡톡히 반영되고 있다.
머나먼 미래, 그러나 대비해야 지금은 돈을 나눠 내고 기술을 공유하는 ITER 회원국들은 언젠가 상용화 경쟁대상이 될지 모른다. 고수와 바둑을 두며 한 수 배우는 입장인 우리나라도 ITER 이후 실증로 건설에서 치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ITER 건설을 나눠 맡고 있는 회원국
사업단장 회의 참석을 위해 카다라시를 방문한 정기정 핵융합연구소 ITER사업단장은 "인력을 양성하고 기술이 단절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ITER 준공 직후부터 실증로 설계에 착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핵융합에너지는 아직 먼 이야기다. ITER는 30여년 전 처음 기획돼 30년 뒤까지 운영된다. 본격 상용화는 2050년대 이후다. 불확실한 미래 기술에 이런 거액을 쏟아 부어야 하느냐는 우려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ITER 버스를 잡아타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테고, 나중엔 하고 싶어도 못할 일"이라고 김용환 사무차장은 말한다. "인간이 꿈꿔 온 일 중에
타임머신 빼고 현실화하지 않은 게 있었느냐"고 임기학 박사는 반문한다. 올해 마흔일곱인 최창호 박사는 "지금 ITER를 통해 최대한 기술을 배워 한국의 핵융합 실증로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핵융합기술은 인간 세대 기간을 넘어서는 분야다. 지금 활동중인 전문가 중에는 상용화를 보지 못할 이들도 없지 않다. 그래도 그들은 언젠가 인공태양이 떠오르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