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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메달을 걸고 시상대에 오른 너희들의 자랑스러운 모습 위로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것은 김연아보다도 어린 열여덟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유관순 소녀의 얼굴이다. 밴쿠버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함성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 소리가 함께 메아리치는 곳에 우리가 있다.
나라 잃은 시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차갑고 위태로운 역사의 빙판 위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지금 88 서울 올림픽 때 태어난 너희들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의 빙판 위에서 올림픽 경기의 운동을 즐긴다. 같은 젊음이요 같은 운동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독립운동을 한 유관순의 피와 피겨 스케이팅 운동을 한 김연아의 땀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라 잃은 유관순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탄생한다면 김연아가 되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김연아가 100년 전 망국의 땅에 태어났더라면 유관순의 이름으로 기억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삼일운동의 영웅들이 있었기에 오늘 밴쿠버의 영웅이 있다는 것을 너희들은 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조국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그렇다. 나라라고 하는 것은 분명 추우면 주워 입고 더우면 벗어 던지는 그런 옷가지(衣裳)가 아니다. 그것은 피부와도 같은 것이어서 어디를 가나 몸처럼 따라다닌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겨울올림픽은 기후와 그 경제조건으로 북방에 몰려 있는 유럽 선진국의 독무대였다. 그런데 오늘 너희들이 금메달을 따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개인의 기량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너희들 나라가 독립해 있었기에, 서구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발전했기에 가능했다.
너희들이 5000m와 아시아 선수들이 넘을 수 없다던 1만m 스피드 종목의 벽을 넘어 금메달을 움켜쥘 때 나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벽을 넘어서’의 대본을 만들던 일을 상기했다. 20년 뒤 너희들이 정말 벽을 넘어 세계의 한복판에 설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김연아를 보라. 피겨 스케이팅의 피겨란 그림(圖形)을 뜻하는 말이다. 영국 귀족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 위에 하트 모양이나 글자들을 그리며 즐기던 운동이었다. 김연아가 세계의 빙판 위에 그린 꿈과 메시지도 ‘벽을 넘어서’였다. 김연아가 세운 세계 신기록을 남자의 채점 방식으로 옮기면 168.00점. 남자 피겨 우승자인 라이사첵의 167.37점을 넘어서는 득점이다. 피겨 여왕이 아니라 피겨 제왕이라고 불러야 옳다.
또 김연아는 라이벌 일본의 벽을 넘는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스포츠는 그냥 스포츠로 즐겨야 한다. 그러나 우연히도 강제합병 100주년이 되는 해에 김연아는 그녀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를 시원하게 이겼다. 데뷔할 무렵 연아는 주니어전에서도 시니어전에서도 패배를 당하고 일기장에 “왜 하필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는가”라며 마오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느 여자 선수도 기록하지 못한 3.5회전의 트리플 악셀을 연속 성공시킨 마오를 20점 차로 꺾은 것은 한국인다운 끈기였다. 쇼트에서는 007 본드 걸의 하드와 다이내믹한 힘을 보여주고, 프리에서는 경쾌하고 청초한 매력으로 조화를 이룬 한국인 특유의 ‘신바람’과 ‘끼’가 일본의 가다(型=틀)를 압도한 것이다.
셋째로 김연아는 한국 문화의 벽마저 뛰어넘어 글로벌한 새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상대에서 흘리는 눈물은 이미 보릿고개에 자란 선수들이 흘렸던 한의 눈물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그늘이나 열등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김연아의 성공 뒤에는 그녀의 가족만이 아니라 코치를 비롯한 외국인 스태프의 드림팀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너희들은 물질적 풍요를 위한 ‘산업화의 경제원리’와 평등을 추구해 온 ‘민주화의 정치원리’ 사이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다. 이제는 이 두 벽마저 넘어 사랑과 소통을 추구하는 ‘생명화의 문화원리’를 창조해 내게 될 것이다.
밴쿠버의 젊은이들아. 너희들 때문에 처음으로 지역차별의 분열도 좌우의 이념대결도 그리고 여야의 갈등도 없이 대한민국은 하나가 되어 모처럼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고맙구나. 장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