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시화 시인의 1집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을 모아봤습니다.
- 차 례 -
안개 속에 숨다
길 위에서의 생각
민들레
잊었는가 우리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목련
세월
소금인형
시월 새벽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섬
도둑
산안개
새와 나무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무
음악학교
많은 눈을 나는 보았다
나는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한때 두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그럴 수 없다
어떤 눈
아무것도 아닌 것들
자작나무
죽은 벌레를 보며...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봄비 속을 걷다
그토록 많은 비가
비 그치고
젊은 시인의 초상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은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길 위에서의 생각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민들레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잊었는가 우리가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목련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세월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강물이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그대를 만나 내 몸을 바치면서
나는 강물보다 더 크게 울었네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배들도 눈물 어린 등불을 켜고
차마 갈대숲을 빠르게 떠나지 못했네
소금인형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시월 새벽
1
시월이 왔다
그리고 새벽이 문지방을 넘어와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만진다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 것이냐고
개똥쥐바퀴들이 나무를 흔든다
2
시월이 왔다
여러 해만에
평온한 느낌 같은 것이 안개처럼 감싼다
산모퉁이에선 인부들이 새 무덤을 파고
죽은 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3
나는 누구인가
저 서늘한 그늘 속에서
어린 동물의 눈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 그것을 따라가 볼까
4
또다시 시월이 왔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침묵이
눈을 감으면 밝아지는
빛이 여기에 있다
5
잎사귀들은 흙 위해 얼굴을 묻고
이슬 얹혀 팽팽해진 거미줄들
한때는 냉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럴수록 눈물이 많아졌다
이슬 얹힌 거미줄처럼
내 온 존재에 눈물이 가득 걸렸던 적이 있었다
6
시월 새벽, 새 한 마리
가시덤불에 떨어져 죽다
어떤 새는
죽을 때 가시덤불에 몸을 던져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고 죽는다지만
이 이름 없는 새는 죽으면서
무슨 울음을 울었을까
7
시월이 왔다
구름들은 빨리 지나가고
곤충들에게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리라
곧 모든 것이 얼고
나는 얼음에 갇힌 불꽃을 보리라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겨울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뒤에 숨은 붉은 열매처럼
여기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는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둘 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무엇인가 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 그것
눈밖에 없는 그것이
밤에 별들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큰곰별자리 두 눈에 박혀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때로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눈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내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을까
여기 겨울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지고 난 붉은 열매처럼
차가운 공기를 떨게 하면서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떨게 하는 것이 있다
섬
바다에 섬이 있다
섬 안에 또 하나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로 나가면 다시 새로운 섬
섬 안의 섬 그 안의 더 많은 바다 그리고 더 많은 섬들
그 중심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들면서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또 꿈꾸었다
꿈 속의 꿈 그리고 그 안의 더 많은 잠 더 많은
꿈들
도둑
도둑이 온다면
큰 길로야 오지 않겠지
그가 온다면 내 집 뒤 작은 오솔길
풀 몇 줄기 쓰러뜨리며 오겠지
그러면 나는 불을 끄고 잠든 척 해야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하면서
어떤 새가 밤의 풀섶에서
새끼를 치는 것이려니 하면서
도둑이 온다면
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오겠지
그가 온다면 내 깊고 깊은 잠
꿈의 강을 건너 오겠지
그러면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든 척 해야지
잠든 척 하는 자를 누가 깨울 수 있으랴
그는 이미 깨어 있기에
산안개
나에게 길고 긴 머리카락이 있다면
산안개처럼 넉넉히 풀어 헤쳐
당신을 감싸리라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나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의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음악학교
나에게 노래가
하나 있었지. 바닷가의
짐승들, 오래된 숲 아래
작은 나라.
오늘밤 내 그 노래는
너를 침략하리라. 너의 여윈
몸 홀로 있음을 침략하리라.
바닷가, 내 작은
나라. 달팽이의 뿔이 가리키는
숲 아래 오래된 집.
나는 너에게 연필로
편지를 쓰다가 책상 밑에서
잠든다. 때묻은 소매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든다. 푸른 새.
그러는 사이에도 손톱은 자라고
바람은 지붕위에 별들을
뿌린다. 강물은 쉬지 않고
거슬러오른다. 등불의 심지는
작아지고 점점 커져가는
내 그림자.
나무들 아래 내가 키우는
바닷짐승들
모여드는 나라. 나에게 노래가
하나 있었지. 다시는
못 부를 노래가.
누울 자리에 누워라, 숲의
새들의 저녁. 짐승들 잠들면
국경을 넘어가는 내
노래가 하나
있었지. 바닷가의 집,
침묵의 노래.
많은 눈을 나는 보았다
눈물로 가득한 눈
꽃잎처럼 눈물을 뚝뚝 떨구는 눈
이루지 못한 욕망에 한숨짓는 눈
눈웃음짓는 눈
많은 눈을 나는 보았다
절망한 자의 눈
어린아이의 눈
세상을 초월한 눈
그리고 흙으로 채워진 죽은 자의 눈을 나는 보았다
장님의 움직이지 않는 눈도 보았다
짐승의 눈과 곤충의 눈과
내 눈을 들여다보는 어떤 눈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미친 자의 눈도 나는 보았다
사랑할 것이 있는 눈과
사랑을 찾아 헤매는 눈
어떤 눈은 인생을 이미 다 살았고
어떤 눈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
모든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호랑이가 한 마리 내려왔다
내 눈동자는 호랑이의 눈을 따라 크게 떠지고
눈꺼풀 안에서 상처입으며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앉아
옛날의 정원을 꿈꾸었다 그러자
정원이 내 곁으로 내려왔다
나는 정원으로 걸어들어갔다 호랑이를 데리고
한낮의 벌과 나비들이 식사를 하고
난데없는 무덤들을 휘돌아 꽃나무 그늘 아래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어른거리다
서둘러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메아리 하나가 그 뒤를 따라 도망쳐가고
누군가 내 속에서 나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호랑이와 함께 뒤돌아 걸어나왔다
한번도 열어보지 않은 정원의
문을 열고 기억나지 않은 길을 걸어
나는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내 둘레에서 불이 일어났다 나는 눈을 감고 앉아
정원의 어린 꽃나무들이 뒤채이고 둥글게
원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호랑이는 내 눈을 찢고
불꽃과 싸우며 내게서 달아났다
우리는 한때 두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로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게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였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그럴 수 없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물은 내게 무가 되라 한다
허공을 올려다보면
허공은 또 내게 무심이 되라 한다
허공을 나는 새는
그저 자취없음이 되라 한다
그러나 나는
무가 될 수 없다
무심이 될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나 내 흔적은 남고
그는 내게 피 없는 심장이 되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도둑처럼 밤중에 이슬을 밟고 와서
나더러 옷을 벗으라 하고
내 머리를 바치라 한다
나더러 나를 버리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내게 물이 되라 하나
나는 불로서 타오르려 한다
그는 내게 미소가 되라 하지만
그러나 아직 내 안에 큰 울음이 넘쳐난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라 하나
나는 그럴 수 없다 한다
어떤 눈
분명히 이곳에 어떤 눈이 하나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
양떼구름들 속에
기억나지 않는가, 기억해 보렴
분명히 너는
이곳을 지나갔었다, 그때
어떤 눈이
너의 삶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히
이 저녁안개 속에서 너의 삶이
천천히 흘러갔었다 그때
무엇인가
이곳에 있었다 저 뒤에
저 뒤켠에서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가, 기억해 보렴
그때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생각들이 너의 머리를사로잡고 있었다
너는 일찍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아니, 모든 것을 알았자
그래서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저곳에서 새의 눈이
저 나무 꼭대기 위에서 너를,
너의 눈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눈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
여기에 둥근 기둥이 있어 아무도 그것을 둘러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여기에 흙 위에 솟아나온 뿌리가 있어
그것은 방향 없는 눈
아무것도 아닌 것
발에 채인다 여기
모든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
빛을 갉아먹는 황금색
벌레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
새삼 사랑을 공개할 필요는
없으리라 눈 위에 눈 위의 감시자들에게 새삼
나의 애인을 들추어 낼 까닭은 없다
여기
하늘에서는 조용히 구름이 날고 이미
이전에 왔던 이가 또 소리친다
이제 곧 종말이 오리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있음을
안다
눈 속의 감자들, 감자의 죽은
눈들
우리는 소리 없이, 줄지어
검은 나무들 아래로 지나간다
안개, 기둥들,
들리지 않는 소리들
한때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것들,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여기에 멈추지 않는 흐름이 있어 우리와 함께
지나간다
소리지른다, 언제나 들리는
소리들
여기에 우리가 서 있어 아무도 우리를 구속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여기에 찬란한 기둥들이 서 있어 아무것도
우리의 찬양을 받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
자작나무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침묵이다
자작나무를 바라보면
이미 내 어린시절은 끝나고 없다
이제 내 귀에 시의
마지막 연이 들린다 내 말은
나에게 되돌아 올려오지 않고 내 혀는
구제받지 못했다
죽은 벌레를 보며벌레보다 못한 인생을 살았다고 나는 말한다
벌레 한 마리가 풀섶에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죽은 시늉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며칠 뒤 가서 보니 벌레는 정말로 죽어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벌레의 몸이 부서지고 있었다
벌레만도 못한 인생을 나는 살았다
죽은 벌레를 보며
벌레만도 못한 인생을 살았다고
나는 말한다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마치 사탕 하나에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처럼
눈 앞의 것을 껴안고
나는 살았다
삶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그것이 꿈인 줄 꿈에도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사랑을 하고 또 헤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집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등 뒤에 서면다시 한번 쳐다본다
책들은 죽은 것에 불과하고
내가 입은 옷은 색깔도 없는 옷이라서
비를 맞아도
더이상 물이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무엇이 참 기쁘고
무엇이 참 슬픈가
나는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생의 집착도 초월도 잊었다
봄비 속을 걷다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
그토록 많은 비가
1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렸구나
밤 사이 강물은 내 키만큼이나 불어나고
전에 없던 진흙무덤들이 산 아래 생겨났구나
풀과 나무들은 더 푸르러졌구나
집 잃은 자는
새 집을 지어야 하리라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려
푸르른 힘을 몰고 어디론가 흘러갔구나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선
어느새 이 꽃이 지고 저 꽃이
피어났구나
2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는 동안
나는 떡갈나무 아래 선 채로 몸이 뜨거웠었다
무엇이 이곳을 지나 더 멀리 흘러갔는가
한번은 내 삶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것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은 이보다 더 큰 떡갈나무가
밤에 비를 맞으며 내 안으로 걸어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생각은 얼마나 더 깊어지고
떡갈나무는 얼마나 더 풍성해졌는가
3
길을 잃을 때면
달팽이의 뿔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빗방울이
때로는 나무 위의 낯선 새가
모두가 스승이었다
달팽이의 뿔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먼 나라 인도에도 다녀오고
그곳에선 거지와 도둑과 수도승들이
또 내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병들어 갠지스 강가에 쓰러졌을 때
뱀 부리는 마술사가 내게 독을 먹여
삶이 한 폭의 환상임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 영원히 나는 입맛을 잃었다
4
그때 어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치고
비 속을 날아갔었다
밤이었다
내가 불을 끄고 눕자
새의 날개가 내 집 지붕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나는 병이 더 깊어졌다
비 그치고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 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젊은 시인의 초상
아침에 할 일이 없는 날은
나도 쓸쓸하더라 할 일 없이
마음 속에 이런저런 마음만 물밀어 모이고
일어서다 앉다 다시 누워 보는 내 머리맡에
푸른 고양이 한 마리 와서 머물더라
그런 날 아침이면 나도
그 고양이 푸르른 몸 안으로
숨고 싶더라
밤에는 또 기다려도 쉬이 잠이 오지 않더라
어두운 지붕과 지붕을 지나
고양이는 가고 오지 않고
누울 자리에 누워 있으면 낮게
누가 내 이름을 부르더라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보니
그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너였구나
no. | 제목 | 작성자 | 조회수 | 작성일 | |
---|---|---|---|---|---|
공지 | 부원장 | 59889 | 2024년 6월 24일 | ||
공지 | 원장 | 60219 | 2024년 6월 21일 | ||
공지 | 원장 | 60930 | 2024년 6월 16일 | ||
공지 | 원장 | 60713 | 2024년 6월 13일 | ||
공지 | 원장 | 86820 | 2024년 3월 19일 | ||
공지 | 원장 | 88903 | 2024년 3월 11일 | ||
공지 | 교육팀 | 95586 | 2024년 2월 20일 | ||
공지 | 부원장 | 101163 | 2024년 2월 13일 | ||
공지 | 원장 | 111403 | 2024년 1월 8일 | ||
공지 | 원장 | 143109 | 2023년 9월 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