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술(79).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만났다. 전 미래산업 회장인 그의 부인 양분순(80) 씨 이름을 딴 건물이 카이스트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다. 2003년 이 교내에 ‘정문술 빌딩’이 지어진 이후 14년 만에 부인 이름이 붙은 ‘양분순 빌딩’이 바로 옆에 나란히 세워진 것이다. 바이오 및 뇌공학과 실험실로 쓰일 이 건물은 정 전 회장이 3년 전 기부한 215억 원 중 100억 원과 교비 10억 원으로 건립됐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2001년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에서 갑자기 해고된 그는 1983년 반도체 장비 제조사 미래산업을 창업했다. 벤처기업 10여 개를 세우거나 출자해 ‘벤처업계의 대부’로도 불렸다. 2000년 미국 나스닥 시장에도 상장했다. 그리고 1년 후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경영권도 혈연관계가 없는 후임자에게 물려줬다. 18년간 혹독한 실패의 시기를 이겨내면서 일궈온 회사였다. 그의 퇴임 일화는 지금도 전설이다. 법인카드 한 장을 반납하고 재무팀에서 인감과 개인 통장을 돌려받는 걸로 퇴직 절차를 마쳤다. 부인은 물론 2남 3녀의 자식들에게 회사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엄명했다. “융합 학문을 발전시켜 달라”며 카이스트에 300억 원을 기부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는 “두 아들을 불러 이 사실을 알리고 난 다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 미안함과 모든 걸 이해해 준 고마움이 섞여 뜨거운 청주를 석 잔이나 연거푸 들이켰다”고 토로했다.
부인 양 여사의 ‘기부 사랑’도 부창부수다. 정 전 회장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느 날 아내가 5억 원을 달라고 했다. 그 돈의 용처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한 달쯤 후 우연히 아내에게 온 우편물을 발견했다. 아내가 ‘익명’으로 기부한 그 돈으로 660명이 백내장 수술을 받게 됐다는 맹인선교사업 관계자의 감사 편지였다’.
카이스트에 총 515억 원을 쾌척한 정 전 회장이 사회를 향해 던진 말들은 여전히 울림이 크다. 세계적인 ‘기부왕’ 앤드루 카네기를 존경한다는 그는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지 않고 기부함으로써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돈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말했다. ‘유산은 독, 부는 빚’이라고도 했다. 소득 불평등·양극화의 검은 그림자가 대한민국을 휘감고 있는 요즘 지도층 인사들이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철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