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에 다니던 학교를 선생님한테 기초를 배우는, ‘학’(學)의 과정이라고 하면, 학교를 마치고 밖에 나와서는 ‘습’(習)을 해야 합니다. ‘습’은 배운 것을 가지고 날아가는 것을 몸에 익히는 과정인데, 그때는 스스로 하는 수 밖에 없어요. 이를 위한 학습 공간이 서재죠. 한 권 한 권의 책이 스승이고, 또 그 책을 쓰신 분들이 다 선생님이니까 서재라는 것은 사실 학교죠.
병원의 서재에는 철학, 문학 책이 많습니다. 실용적인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병원에서, 저 책들을 읽으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마음을 풀거나 감수성을 호흡할 수도 있게 되죠. 안동 집의 서재가 주된 서재인데, 그곳의 책들은 30세 이후부터 두루두루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모은 책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잡지까지 섞여 있는 곳입니다. 이곳 서울 집필실의 서재에는 지금 하는 일들에 실용적인 도움을 주는 경제학, 사회학 책들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책은 곳곳에 던져두는데 혹시나 그 책이 필요해서 다시 찾으려면 쉽게 가서 찾게 됩니다. 아무래도 책이라는 것은 내가 손에 붙이고 생각을 했던 물건들이라, 그것들이 어디 갔는지 찾아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과정이 아닌 것 같아요.
책을 볼 때 줄을 긋거나 적거나 하지 않아요. 줄을 긋는 것은 다음에 다시 보고, 그때 외우거나 이해하겠다는 이야기거든요…… 읽어야 될 책, 새로운 책은 많기에 저는 가능하면 첫 번에 씹어먹고, 꿀꺽꿀꺽 삼켜 소화한 다음, 내 몸에 저장하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 습관을 붙였어요.
방법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책을 읽을 때는 일단 목적을 둬야 합니다. 예를 들어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인데요.
중국 철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에도 이 책을 골랐다면 무모한 도전일 수 있거든요. 이 때에는 산봉우리를 넘는 기분으로 숙독하고 정독해야 해요. 숙독은 집중해서 읽는 것이고, 숙독의 과정에서 내가 이 책을 통해 얻기로 했던 목적을 계속 되짚으면서 목적성을 따라가는 게 정독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만약에 내가 중국철학에 대해서, 나름의 시각이 있는데 대 철학자가 이것을 어떻게 분류했는가, 라는 것이 궁금하다면 간독과 발췌독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책에 대한 목적이 필요한 거죠.
만드는 것과 같죠. 음식 만들 때 어떻게 재료를 보관하고, 어떤 재료를 배합하고, 당뇨병 환자는 이런 걸 먹으면 안 되고, 돈에 따라서 메뉴를 골라야 되고 이렇잖아요. 책도 마찬가지에요. 자신의 지적 역량, 시기, 준비, 지금 현재 이것을 받아들일 자세, 이 책을 어떻게 만나야겠다라는 설계, 이런 것들이 필요하죠. 그런데 그냥 베스트셀러라고 한다고, 누가 좋은 책이라 한다고, 자신의 목적도 없이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책을 넘긴다면, 그야말로 시간만 낭비하는 거잖아요.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솔직히 ‘나는 시간이 없어, 바빠.’ 라고 말씀하시는 분 중에서 자신이 목표하는 곳에, 꿈꾸는 곳에 가 있는 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바쁜 것 같은 착각을 하죠.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계 시간에 익숙해져 있죠. 하지만 시계 시간 중에 충실했던 시간만 모아보면 하루에 얼마가 안 될지도 몰라요.
가장 바쁜 날 저의 일정을 예를 들면, 좀 황당하시겠지만,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7시부터 9시까지 라디오를 진행하고, 잠시 회의를 마치고 운동을 한 다음에 11시 30분에 강연을 갑니다. 그 후 비행기를 타고 울산에 가서 강연을 하고, KTX 타고 대구로 이동해서 또 강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강연을 마치고, 11시 정도에 잠깐 모임에 얼굴만 내밀었다가 와서 자는 날도 있어요. 이렇게 들으면 헉!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시계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래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예를 들면 비행기를 타고 울산까지 가면, 4~50분 동안 누구의 방해 받지 않고 비행기 안에서 책장을 넘길 수 있고요. KTX타고 올라올 때는 최소한 두 시간은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집에서도 식탁 옆에 책이 한 권 있어요. (의사로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밥 먹으면서 대충 훑어볼 수 있는, 간독할 수 있는 책을 한 권 두고요. 화장실에도 책을 둘 수 있잖아요. (장이 나쁜 분들에게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화장실에 있는 책은 정독하는 책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집중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한 두 줄 가지고도. 그렇게 보면 중간에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은데. 그 점에서 독서가 참 좋아요. 왜냐하면 한 권의 책만 있으면 종일 놀 수 있잖아요.
최근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은 ‘에콜로지카’라는 책이었어요. 우리 사회 스스로 자멸의 길로 달려가는 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삶, 제도, 그리고 철학으로서의 생태주의를 강조하는 책이에요. 아주 얇은 책인데 굉장히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나 장르는 계속 변해왔습니다.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작가들이 쭉 하나의 연결선상에서 손을 잡고 서있죠. 만약에 문학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마음에 듭니까?’ 라고 물어보면 ‘쿤데라’라고 하겠습니다. 쿤데라의 책을 읽으면서 불어, 헝가리어 그리고 동유럽의 정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니체가 한 말 중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라는 말을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는 대개 익숙한 것에 대해서 호의를 갖잖아요. 해보지 못한 것, 대하지 못한 것을 대하면 일단 거부감을 느끼고, 꼭 필요하지 않으면 회피하려고 하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는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는 것에 호의를 갖게 되면 새로운 것을 만나는, 영접하는 기쁨이 있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물리적, 시공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접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매일 ‘나는 새로운 사람만 만나겠어.’라며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 수는 없잖아요. 이처럼 내가 가진 생각이나 사람의 90% 정도는 기존의 내 범주 안에 있던 것들입니다. 그것을 깰 수 있는 것은 결국 책이에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만나지 못했던 세계가 그 안에 그대로 담겨 있지 않습니까.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분야의 새로운 책을 통해 그 분야를 염탐할 수 있는 기쁨! 이게 책의 즐거움이지요.
우리 사회가 광속으로 변하면서 전문적인 분야가 분화되기 시작해요. 옛날에는 분야가 하나의 쇳덩어리였다면 그것이 망치로, 못으로 분화되고, 지금은 그 한 덩어리의 쇠가 날카로운 바늘들로 나뉘어버린 것이죠. 그렇게 되니 아주 날카롭고 예리한 지식은 많이 퍼져 있는데, 이것을 연결해서 쓰는 방법은 오히려 몰라요. 바늘을 엮어서 낚시 도구로 만들 수도 있고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이것을 엮을 수 있는 능력, 우리가 융합, 통섭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경쟁력이고, 최종 승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해요. 이를 위해서는 사색하는 훈련이 필요하고, 그러니까 인문학에 답이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어요. 그래서 예전에 20대들에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추천하기도 한 거에요. 혹시 이 책을 안 읽었다면 한번 읽고, 생각하면서 넘어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잘 안 읽죠. 우리는 백두대간 종주도 하고, 극기훈련도 가잖아요. 국문만 읽을 줄 안다면 책 한 권 뜻은 몰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며칠이면 다 읽지 않겠어요? 그 정도 우리는 도전할 힘도, 의지도 동기도 없는 게 문제죠. 토익점수를 위해서는 그렇게들 노력하잖아요. 이런 책을 읽는 도전이 사실 쉽지는 않아요. 그런데 난해하든 난해하지 않든, 내가 접하지 않았던 세계를 한 번 정복하고 나면 성취나 깨달음, 자극이 있을 거에요.
<출처: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출처] 박경철의 서재는 학교이다. (한국창직역량개발원) |작성자 밝은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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